국세청 쇄신안 … 100대 기업과 부적절한 사적 만남 금지령

 

29일 서울 수송동 국세청에서 열린 ‘전국 관서장 회의’ 참석자들이 ‘고위 공직자 청렴 서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덕중 국세청장, 이종호 중부지방국세청장, 이승호 부산지방국세청장. [뉴시스]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은 이제 없다. 자신이 한 행동이 언론에 공개됐을 때 과연 떳떳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 답에 따라 행동하라.”

 

김덕중 국세청장이 29일 전국 세무서장과 본청·지방청 관리자 263명이 모인 ‘전국 관서장 회의’에서 한 얘기다. 김 청장이 언급한 건 이른바 ‘뉴스페이퍼 테스트(Newspaper test)’다. 미국의 투자 대가 워런 버핏과 제너럴일렉트릭(GE)이 사업 파트너를 고르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활용하는 판단 기준으로 유명하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느냐(Legal standard)’를 넘어서 오해받을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평판 리스크’ 관리가 중요해지면서 강조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날 국세청이 내놓은 ‘국세행정 쇄신방안’에도 이 원칙이 적용됐다. 앞으로 국세청 본·지방청 국장급 이상은 100대 기업(매출기준·지주회사 포함)의 사주, 임원·고문, 세무 대리인과 ‘부적절한 사적 만남’을 갖는 게 금지된다. 국세청은 그 예로 식사와 골프를 들었다. 사무실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거나, 동창회 참석 등 사회 통념상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국세청 고위 공직자들은 이런 내용이 담긴 ‘청렴 서약서’에 서명했다.

 

관서장 263명 청렴서약서 서명

 

국세청 간부들은 이를 사실상 ‘기업 관계자 접촉 금지령’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 국장급 관료는 “100대 기업이란 말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아예 기업 관계자와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가진 힘의 원천인 동시에 비리의 연결고리인 세무조사에 대한 견제와 감시도 강화된다. 대기업에 대한 모든 정기 세무조사에 대해선 앞으로 감사관실이 사후 정밀 검증을 할 예정이다. 이전환 국세청 차장은 “조사 과정에서 청탁이나 납세자와의 유착이 일어날 소지를 없애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김덕중 청장 “나부터 안 만나겠다”

 

‘세무조사감독위원회’도 만들어진다. 과반수를 외부 출신으로 채우는 이 위원회는 일정 주기로 이뤄지는 정기 세무조사는 물론, 논란이 집중됐던 ‘비정기 세무조사’(특별 세무조사)의 기준과 절차, 방식을 심의하게 된다.

 

이 같은 쇄신안이 나온 것은 최근 잇따른 전·현직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연루로 국세청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군표 전 청장, 허병익 전 차장이 CJ그룹으로부터 명품 시계와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송광조 전 서울청장도 CJ로부터 골프접대를 받은 것이 드러나 이달 초 불명예 퇴진했다. ‘신뢰의 위기’는 최근 본지가 동아시아연구원(EAI)과 공동으로 실시한 국민 인식 평가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국세청의 영향력은 2011년 9위에서 올해 7위로 올라섰다. 반면 신뢰도 순위는 7위에서 11위로 뒷걸음질쳤다. 27일 국세청 간부들을 대상으로 ‘청렴교육’에 나선 안대희 전 대법관도 “국세청이 국민의 기대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면 개혁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0년 이후 역대 청장들이 들어설 때마다 국세청은 비리를 막을 각종 제도와 개선책을 내놨다. 하지만 ‘약발’이 잘 듣지 않았다. 고위직들의 비리 사건이 이어지며 국세청 전체에 대한 평판과 신뢰를 갉아먹은 탓이다. 이번 쇄신안이 고위직을 집중 겨냥한 것도 이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김덕중 청장은 “쇄신방안의 성공 여부는 고위 관리자들의 솔선수범에 달려 있다”면서 “나부터 이 시간 이후로 대기업 관계자와 사적으로 부적절하게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추락한 신뢰 회복 위해 극약 처방

 

일각에선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무조사와 관련된 재량권과 자의성을 제도적으로 줄여 비리와 부조리가 개입될 여지를 줄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국회에선 ‘세무절차법’ ‘국세청법’ 등을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홍기용 인천대(세무회계학) 교수는 “세무조사의 절차와 방식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부분 국세청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훈령으로 규정돼 있는데, 이를 법제화해 납세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