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보이지 않는 손, 주한미대사 파워

 

미 국무부 정무적 판단 돕는 컨트롤 타워 역할

 
“청와대 회의를 마친 뒤 한두 시간이면 그 내용을 미국대사관이 거의 알고 있더라.”
“한국 장·차관이 미국 대사관의 참사관 정도를 만나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박철언 전 의원이 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라는 저서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다. 1980년대까지 한·미계와 주한미국대사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박 전 의원은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의 일방적 패권이 형성되던 시기의 얘기”라면서도 “당시 한국 정부는 일방적인 친미노선을 견지하던 상황에서 기형적 외교 행태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냉전체제하의 1980년대와 같은 것은 아니다. 미국대사관의 영향력이 주재국의 국력을 반영하게 되어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도 경제 10위 대열에 있는 스몰파워 국가다. 그만한 외교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대사관도 더욱 세련되지만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한국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 때 소통 원할하지 못해
이원덕 국민대 교수(국제학부)는 주한미국대사관을 “한·미동맹 관리의 첨병이며 중재자”라고 규정했다. 한·미동맹이 곧 대한정책을 포괄한다는 얘기다. 한·미동맹은 경제·사회·문화적 양국관계 증진, 동아시아 군사전략 운용, 북한 핵 관리 등 중요 현안은 물론 한국 국민의 반미 감정까지 다루는 포괄적 개념이라는 얘기다. 물론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국 국무성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미국대사관은 미국 국무부의 대한정책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무적 판단을 돕는다. 물론 그 컨트롤 타워는 미국 대사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32번지 미국 대사관에 한국인 직원을 합해 2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외교관 신분을 가진 CIA 요원을 포함해 모든 직원은 공식적으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의 지휘를 받는다. 강용진 서울시정연구소 선임연구원도 “미국 대사가 총체적으로 한·미동맹을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미국 대사의 정책적 판단은 한·미관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때는 미국대사관과 한국 외교라인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재천 전 의원은 “참여정부 때 미국 입장에서 ‘이종석의 외교정책’에 대해 얘기할 한국 내 핫라인이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미국 외교관들은 정책 차이를 이해했고 또 존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조금 다른 상황이 빚어졌다. 참여정부 때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이 당시 통일부 장관인 정동영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의장을 만나 ‘이종석 NSC 차장과 일을 같이 못하겠다’고 항의했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박철언 전 의원도 “전두환 정권 당시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이철·박찬종 의원 등이 나의 비밀특사 역할을 거론하며 나의 퇴진(안기부장 정책특보)을 주장했다”면서 “아마 극우 친미주의자들이나 미국 관계자들이 그 정보를 흘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한국 외교의 균형자론을 주창했고, 박 전 의원은 비밀 북방외교를 추진했다. 이들은 적어도 자주적 외교 노선을 표방한 사람들이다.

 

훌륭한 외교관은 본국은 물론 주재국의 이익을 돕거나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대사관은 매우 세련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원희룡 의원은 “그런 측면에서 미국대사관은 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쇠고기 정국 과정에서 곤경에 처한 한국 정부를 도운 것은 미국대사관이다. 미국 국무부와 농무부는 당초 이명박 정부의 추가협상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입장을 바꾼 것에는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대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미국대사관이 한국 국민의 반미감정 카드로 미국 정부를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버시바우 전 대사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게 항의전화를 하면서 그런 노력이 묻히고 말았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 한국인과 직원 20여 명이나
한 국가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또 관계 기관도 무수히 많다. 미국 외교 파트에 근무하는 사람이 무려 6000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 만큼 대사관의 정무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냉전체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서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정무적 기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미국 국무부 내 한국과 직원이 중국, 일본보다 많은 20여 명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재천 전 의원은 “세계 전략의 핵심인 북한 정보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외교관의 예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대선과 관련한 정보 등에 관해서도 절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맴버인 원희룡 의원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매우 중립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7월 3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1회 뉴평택 컨퍼런스에서 토론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 왼쪽부터 랄프코사 퍼시픽 포럼 대표·잭크라우치 전미 외교안보 보좌관·하영선 서울대 교수·래리닉쉬 미의회연구소 연구원. <동아시아연구원 제공>

 

정무적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정책 입안자인 정부의 외교부 공무원과 국회의원, 그리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학계 인사다. 한국의 각계 요인이 미국대사관 직원과 접촉하는 것은 미국 측의 요구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정무참사관(최근까지 정무참사관은 한국계인 조셉 윤씨로 최근 부대사로 승진했다)은 한 달에 몇 차례씩 정치인과 공식·비공식적인 만남을 주최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참여정부 때 각종 비공식·공식적 포럼을 제외하더라도 대사와 부대사 초청 모임에 5~6차례 나갔다”면서 “어느 때는 모임 멤버 구성도 위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모임은 정무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정보 수집 능력과 분석 능력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김병국 전 외교안보수석, 하영선 서울대 교수·김경준 전 주미대사, 김부겸·권영길·박영선 의원, 노회찬·최재천 전 의원 등도 단골 초청자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과의 대화와 수집된 정보를 조직화하는 곳은 대사 산하의 ORS(Office of Regional Studies·지역조사과)다. ORS는 CIA의 서울지부 대외명칭이다. ORS 소속 20여 명은 한국말로 발행된 각종 언론보도와 보고서, 대면접촉 정보 등을 분석·정리해서 버지니아주 랭리에 있는 CIA 본부로 보낸다. 서울의 주요 인물의 동향, 특히 정국현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김병국·김경준 씨 등 단골초청자
민주당 소속의 한 의원은 “참여정부 시절 월리엄 스탠튼 주한미국대사관 부대사로부터 세번이나 초청받았다”면서 “미국 외교관은 자기가 얻은 정보만큼 돌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 김병국 전 수석 때 비공식 토론 모임이 있었는데 김경준 전 주미대사, 김부겸·권영길 의원 노해찬 의원 등이 참석, 이명박 정부의 외교노선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 토론회의 한 참석자는 “미국은 자신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정권이 들어섰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면서 “그러나 최근에는 매우 답답해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미 간의 현안인 미국 대사관 부지나 미군 이전 문제 등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전략동맹은 얘기하지만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002년 ‘효순·미선 사건’ 이후 미국대사관은 특히 소프트 파워를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반미 감정을 문화가치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2002년 여중생 사망 사고 당시 미국 병사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선고 공판이 대선 직전인 11월에 열린 것과 관련해 워싱턴의 한국 담당자들이 조율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버시바우 전 대사는 꾸준히 인터넷 대화, 지방대학 강연 등을 다녔다.

 

김경은 기자

 

역대 주한미대사, 어떤 역할했나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은 우방이자 제국의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왔다. 미국은 서구 민주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자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반민주적인 한국 군사정권 체제를 묵인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18일 임기를 마친 버시바우 대사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19명의 미국 대사가 한국을 거쳐갔다. 역대 주한미대사들은 미국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한편,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한국 정치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 미대사들은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의 고비를 목격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나 회고록 등은 한국 현대사의 숨겨진 배경을 이해하는 유용한 자료 구실을 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부임한 사무엘 버거 대사는 군사정권에 대해 명시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도록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한 필립 하비브 대사는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겪었다. 하비브 대사는 본국과 연락을 통해 납치 사건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청와대로 직행했다. 하비브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 납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재임한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부임 후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핵개발 시도를 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재임한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뒤이은 군부 쿠데타,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최대 격변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의 만행을 묵인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글라이스틴은 199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행동에 미국이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한 제임스 릴리 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또 하나의 분수령인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지켜보았다. 그는 1987년 6월 19일 오후에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몇 시간 후 전 대통령은 군대 투입을 유보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압력이 전두환 정권의 군대 투입을 막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990년대 들어 부임한 주한미대사들은 북한 핵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재임한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재임 중 발생한 북핵 문제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미국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에게 설득하는 데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재임한 토머스 허버드 대사는 대사 부임 전부터 제네바 협상 및 경수로 문제로 북한 측과 협상을 벌인 남북 관계 전문가였다. 2004년 9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재임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또한 협상 전문가로서 6자회담 수석대표로 활동 중이다.

 

정원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