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제국 편승’만이 우등생 되는 길?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서평

하영선 엮음|EAI|540쪽|2만5000원

 

17세기 초 프랑스의 국가전략가 리슐리유는 바티칸의 추기경이었다. 바티칸은 로마제국을 사상적으로 정복한 또 하나의 제국이었지만 리슐리유는 바티칸제국의 관점이 아니라 프랑스 국가의 관점에서 30년 전쟁을 이끌었고, 베스트팔렌의 평화로 가는 길을 닦았다. ‘국가이성(raison d’Etat)’의 탄생이었다.

 

21세기 초 한국에는 과연 이러한 국가이성이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냉전시대에는 미·소 진영 내의 줄서기가 국가이성의 필요성을 압도했고, 오늘날에는 세계화의 흐름이 국가이성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이성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을 ‘그물망 국가의 건설’에서 찾고 있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내로라 하는 한국의 전략적 고수들이 참여한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의 발전과 확산을 위해서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새로운 문명표준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21세기 한반도 역사의 미래는 어둡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문명적 표준’ 형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야만성’에 대한 국제정치학적 성찰은 너무 생략된 느낌이다. 여러 방면에서 외세에 시달렸던 한국의 입장에서 문명적 표준에 관 한 성찰은 로마 교황청이 6년 여의 긴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기억과 화해’의 표준적 문건에 대한 정독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지적처럼 21세기 문명표준의 우등생들에 비해 한국은 열등생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명적 표준이 이라크전쟁까지도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열등생이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매력적인 국가전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先)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도 선(善)진국으로서의 국가전략을 포기할 수는 없다.

 

둘째, 미국이 ‘제국’으로서 지니고 있는 압도적 규정력에 동의하면서도, ‘국제’에 대한 보다 복합적이고 균형적인 관심의 배분이 필요했을 것 같다. 각국의 변환전략에 대한 개별적 고찰을 통해 변화하는 동아시아를 다루고 있는 1부의 경우 미국에 대해서만 3 개의 장이 할당되어 있다. 미국의 압도적 규정성을 고려한 관심의 배분일 것이나, ‘지구 제국’의 압도적 규정성도 때로는 ‘지역 제국’의 공간적 인접성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점증하는 중요성을 지닌 인도나 오세아니아는 차치하더라도 21세기의 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될 러시아, 그리고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분석이 생략된 채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또한 북핵 문제, 주한미군, 한·미 FTA 등 21세기 한국의 국가전략을 각론적으로 다룬 2부의 글들에서도 일관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미국에 대한 제국 편승론이다. 그리고 그물망의 중심은 여전히 한미동맹이다. 그러나 미국의 문명적 표준 설정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국제’적 움직임, 특히 상하이협력기구나 유럽연합 등과의 길항적 관계 위에서 21세기 문명적 표준의 변환을 포착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그물망 국가’가 필요로 하는 ‘외세 활용의 다변화’와 ‘초당파적 국내역량 결집’을 위해서도 아쉬운 대목이다.

 

김명섭 연세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