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승패보다는 선거 이후가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끌어온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5.31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이 최대의 패배를 기록한 선거, 또한 민주화 이후 줄곧 하락해 오던 유권자의 투표율이 처음으로 소폭 반등한 선거로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 선거였다는 점이다. 2002년 봄 광주의 경선을 통해 힘차게 문을 열었던 노무현 시대는 이제 황혼기에 들어섰다.

 

우리는 내년 말까지 노무현 시대, 그리고 1998년 시작된 "진보 10년"과 "민주화 20년"을 진단하고 앞날을 설계해야 하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됐다. 정치세력들이 성급하게 혹은 전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해석이 "한국 정치의 보수화"이다. 지난 10년간 권력을 장악해 온 진보정치의 거품이 꺼지고 있고, 여기서 등을 돌린 유권자들이 보수화하고 있다는 이 주장은 잘못된 진단이다.

 

우선 12:2:1:1 또는 서울 지역 25:0 등으로 표현되는 한나라당의 압승은 "단순다수제의 착시 효과"다. 당선자 한 사람만을 가리는 우리의 선거제도는 다소 우세한 세력이 경쟁을 압도하는 듯이 결과를 과장해 보여 주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냉정하게 정치를 바라보는 성향을 지닌 중간층이 한나라당에 주로 투표한 것은 일회적인 것이지 구조적인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지만, 이들 중간층이 진보정치가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호소력을 완전히 저버린 것도 아니다.

 

압승한 보수세력과 패배한 진보세력 사이에 궁극적인 잠재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이후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열린우리당은 대부분의 투표 단위에서 30%가량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내년의 본선 경쟁력은 진보.보수정당의 개혁, 구체적으로는 "정치가 생활 속으로" 다가가는 개혁 경쟁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여당이 안고 있는 숙제의 핵심은 높은 이념의 제단으로부터 내려와 보통 사람들의 생활 현장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민주화와 개혁.평화의 이름으로 거창한 구호와 주장이 숨가쁘게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런 이념과 구호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인간답게 가꾸는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활은 빡빡해지고 시민들은 허탈해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진보의 이념과 구호는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질 뿐 시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와 이념이 시민들을 이끌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진보이념과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은 줄곧 멀어져만 갔다.

 

성급하게 축배를 들고 싶은 한나라당의 앞길도 비단이 깔려 있는 건 아니다. 한나라당의 과제는 대표주자의 개인기가 팀 전체의 기본기를 압도하고 있는 딜레마를 푸는 데 있다. 박근혜 대표는 다시 한번 개인적인 흡인력과 호소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지만,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이념적 설득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한나라당은 중간층 유권자들에게 보수이념과 정책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격차, 교육 격차, 그리고 희망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지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보수의 매력을 충분하게 가꾸지 못하고 있다. 정치와 이념은 원래 불완전한 것이고, 따라서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정치를 꾸려 간다는 보수정치의 본질적인 자세는 아직 한나라당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개인기와 기초체력이 균형을 이룬 축구가 강하듯이, 한나라당은 개인적 매력과 보수의 근본을 결합할 때 강해질 수 있다.

 

결국 진보 10년, 민주화 20년을 이어받는 경쟁은 이념의 과잉에 빠져 있는 진보와 이념이 부실한 보수세력 사이의 팽팽한 경쟁이 될 것이다. 이 경쟁은 정치의 초점이 이념으로부터 생활세계로 옮겨 가는 것으로 시작돼야 한다.

장 훈 EAI 거버넌스센터 소장 ·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